성경이 그의 기초가 됨

위클리프의 시대에는 성경이 더 이상 교부들이나 공회의 결의나 교황의 결의보다 높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여겨졌습니다. 위클리프가 성경을 더 친밀히 알수록 그는 유일한 권위를 보았습니다. 다른 나머지는 위클리프가 다음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과 일치할 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

백명의 교황이 있고 모든 탁발 수도사가 주교가 된다하더라도 그들의 의견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한 믿음의 일들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다. [10]

위클리프는 교회가 사람의 전통이라는 혼합 없이 그리스도만 붙잡을 때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전통을 강조할 때면 교회들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위클리프의 성경과 전통에 대한 평가입니다. :

성경은 오류가 없다. 다른 교사들은 오거스틴처럼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사람의 전통이나 교리나 관습들을 성경 위에 놓고 선호하는 것은 눈먼 추정일 뿐이다. 교리에 좋고 적당한 것이 평행하게 많이 있다하여도 그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11]

성경 번역

성경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위클리프는 위대한 신학 박사들의 가르침보다는 성령의 빛비추심을 신뢰했습니다. “성경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이는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성경을 열어주신것과 같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 중에 많은 것들이 거룩한 성경의 진리(Of the Truth of Holy Scripture)라는 책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이자 성약이며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성경 안에 계시고 성경에 무지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해 무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위클리프는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에 관한 이해를 공급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빛 비춤을 받으려면 겸손한 영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지 이단들처럼 조각조각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위클리프는 말씀의 첫 번째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먼저 고려해야 하고 그 다음에 비유적인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또한 적절한 단어의 사용과 바울 서신에서 쓰여진 전치사와 부사를 신중히 인용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위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며 참 하나님으로 영원부터 존재하셨으며 성육신 하실 때 그분의 한 인격 안에서 두 본성을 연결하셨다. 그분의 위대함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유일한 중재자로서 인성의 중심으로서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머리로서 비길 데 없다. [13]

브로드벤트(Broadbent)는 위클리프의 교회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카톨릭 교회나 계급 조직 단체처럼 보이지 않고 선민들로만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로서 보이는 세계에서는 단지 잠시 잠간의 나타남과 인생 행로만 있고 집과 기원과 끝은 보이지 않는 세계인 영원에 있다. 그는 구원이 공식적인 교회와의 관계나 성직자의 중재에 달려있지 않다고 했다. 모든 믿는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자유로이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으며 모든 믿는이들은 제사장이다. [14]

성 바울 성당으로 부르심 받음

교황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관한 비방에 관하여 런던 주교에게 대답하도록 성 바울 성당으로 위클리프를 소환하라는 교황의 교서가 내려졌습니다. 개혁에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것과 정치의 슬픈 혼합을 나타내듯 랑케스터(Lancaster) 공작과 영국의 전례관(marshal)이 위클리프를 동반했습니다. 그들이 법정에 도착했을때 공작과 전례관은 위클리프에게 의자를 주라고 요구했습니다. 주교는 “그는 앉아서는 않된다. 죄인들은 판사앞에 앉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15] 이 말 때문에 회중은 폭력과 혼란에 빠졌고 심리(inquiry)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교를 지지하는 자들은 공작과 전례관을 끌어내려 했지만 그들은 그들을 보호할 그들의 지지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위클리프는 변론 내내 침묵을 지키다가 성당을 나왔습니다.

후에 위클리프는 다시 한 번 심리(trial)에 소집되었습니다. 이번에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런던 시민들은 그의 안전을 두려워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려고 예배당 안에 강제로 들어갔습니다. 영국의 어린 왕의 어머니가 위클리프를 해치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왔을때 심리는 가까스로 시작되었습니다. 교황의 대변자는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협박이나 약속에 상관없이 심지어 그들의 목숨을 걸고라도 의무를 다 해야 한다고 자신들에게 공언한 주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아 배교자를 심문하는 동안 매우 위협을 받아 그들의 연설은 그들의 존엄을 공개적으로 잃고 온 교회가 피해를 입을 정도 까지 기름처럼 부드러웠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