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향한 수고

위클리프는 쉬지 않고 수고하여 진리와 자유 운동을 진행시켰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위해 많은 소책자들을 발간했습니다. 또한 “가난한 제사장들”이라 불리우는 순회하는 전파자들 한 무리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옥스포드 졸업생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러 보내심 받았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던 환대를 받았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종종 성직자들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의 단순한 전파 방식과 영의 간절함은 그들이 어디로 가던 항상 많은 군중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온 나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17] 아우비그네(D'Aubigne)는 위클리프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만약 구걸하는 수도사들이 온 나라를 떠돌며 성인들의 전설이나 토로얀 전쟁의 역사를 전한다면 그들이 전대를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며 광대한 순회하는 복음 전도를 형성하여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귀의시켜야 한다. 그가 그의 제자들중 가장 경건한 이에게 말하기를 “가서 전하라, 이것이 가장 탁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설교후에 술집에 앉아 있거나 노름판에 있거나 사냥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그러한 성직자들을 본받지 말라. 설교후에는 병든 자들과 늙은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앞못보는 자들과 절름발이를 찾아가 능력이 되는 데로 그들을 도우라”고 말했다. 그러한 것은 위클리프가 막을 연 새로운 실제적인 신학 -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가난한 성직자들”은 맨발로 지팡이를 지고 거친 두루마기를 입고 구호품으로 살며 검소한 음식에 만족한다. 그들은 마을 근처 밭이나 교회의 구내나 도시의 장터나 가끔은 교회들 안에 머물렀다. 그들을 좋아한 사람들은 그들 주위로 떼지어 모였다...그들은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을 대중적인 웅변으로 사로잡았다. 이들 중 존 애스턴(John Aston)이라는 옥스포드의 머튼 대학 (Merton College) 특별회원이 가장 사랑을 받았다. 모든 방향으로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거나 시골집 화덕에 앉아 있거나 구석진 네거리에 홀로 있거나 경청하는 청중들에게 전파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난한 성직자들”은 로마와 단지 논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건의 위대한 비밀을 전파했다. “천사는 사람을 위해 속죄할 수 없다” 라고 어느 날 외쳤다... 위클리프는 “죄를 범한 본성은 천사들의 본성이 아니다. 중재자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었다. 이 사람은 반드시 무한히 훌륭해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 이여야만 한다.” [18]

또 다시 종교의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대주교는 사람들에게 위클리프와 “가난한 성직자들”을 독있는 뱀인것처럼 그들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왕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이단들을 계속해서 군중이 열광하는데 나타나게 한다면...우리의 파멸은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롤라드(Lollards) - 시편을 노래하는 자들을 잠잠케 해야 합니다. [19]

위클리프가 죽은 후에도 그를 따르는 이들은 롤라드라 불리웠습니다. 이 이름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어떤 이들은 옛 네델란드어로 노래나 영창이라는 의미인 “롤렌”(lollen)으로 그 기원을 추정합니다. 명백히 이 전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땅을 돌아다녔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전파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

위클리프는 “가난한 성직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파해야 하는지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음식으로 없어서는 안되며 유익하다. …양떼를 성경 진리 없이 영적으로 먹이는 것은 음식 없이 누군가에게 물질적인 음식을 준비해 주는 것과 똑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남과 영적 생명을 낳는 씨앗이다. 지금 전도자의 주요한 일은 교회의 지체를 낳고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래야만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크게 자랄 수 있었는데 이에 반하여 현재는 이러한 영적 씨앗의 부족으로 교회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20]

위클리프는 전파하는 방법에 대하여는 명백하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권했습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함양하는 수단이기에 그는 이러한 씨뿌림이 가능한 한 짧고 완전하게 그러한 목적들을 이행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위클리프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복음전파의 합당한 내용이 있는 곳에서는 미사 여구나 매혹적인 방식의 연설이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듯이 (마10:19) 그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은 참된 헌신적 느낌이다...그로부터 모든 설교가 나와야 한다. “만약 사람이 그 말과 하나되지 않으면 그 말에 무슨 권능이 있겠는가? 만약 사랑이 없다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21]

결국 런던의 주교는 위클리프가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은 위클리프는 글을 써서 소책자들을 유포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죽기 바로 직전에 완성했습니다. 그 당시에 성경과 사람의 양심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3자 회담(Trialogus)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위클리프는 잠시 동안의 마비로 인해 1328년 죽었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피웠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저술들은 강하게 진압되었습니다. 1415년 콘스탄스 공회 - 이 시리즈 중 다음 웹사이트에서 더 자세히 나옴 - 에서 그의 책들은 불태워졌습니다. 1428년에는 그의 시신은 파내어 불태웠고 재는 강에 뿌렸습니다. 이는 로마가 얼마나 위클리프를 미워했는지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