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생활에 대항하는 그의 입장

그가 학교에서 가르치던 초기에는 탁발 수도사들(mendicant friars), 예를 들어 동냥하러 다니는 거지 수도사들로부터 대학을 옹호하는 것으로 널리 유명해졌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이 대학에 문제가 되었습니까? 밀러(Miller)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위클리프]는 대담하고 가차없이 이러한 계급을 공격했고 그들을 기독교계의 극심한 죄악이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도미니코와 소수파 혹은 프란체스코와 아우구스티노와 카르멜이라는 넷으로 나뉘어 유럽의 가장 좋은 모든 곳에서 들끓었다. 그들은 여태까지 파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옥스포드에서도 세력을 얻으려 열심히 항쟁했다. 그들은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학생들을, 부모의 동의 없이, 그들의 수도원으로 유혹하여 탁발 수도회에 가입하게 했다. 이 정도로 이러한 꼬임의 체계가 진행되어 부모들은 더 이상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한 번에 삼만 명의 학생들이 옥스포드에서 공부했었지만 이러한 이유로 숫자는 육백명으로 감소했다. 유럽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와 대학들에 있는 주교와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기꾼들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거의 효과가 없었던 것은 교황이 그들을 가장 친한 친구로서 대하며 그들을 강하게 옹호했고 그들에게 엄청난 혜택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가 이러한 극심하고 우주적인 죄악에 대담하게 공격했다고 우리는 숙명적으로 믿는다... 그는 “유능한 거지에 대항하여 ” 와 “게으른 거지에 대항하여” 와 “그리스도의 빈곤” 이라는 제목의 영적인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는 구걸 그 자체를 비난했고, 그 땅에 횡행하도록 허락 받지 않아야 할 몸 성한 거지의 모든 계급을 비난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받아야할 도움을 가로채는 그들을 비난했다; 그러한 비도덕적인 개종의 조직을 인하여... 평범한 사람들을 꾸며낸 이야기와 전설로 현혹하는 그들의 습관... 거룩한척하는 그들의 위선; 위대하고 부유한 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책망해야 하는 임무 대신 아첨을 함;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얻으려함; 교구는 부식하고 있지만 그들의 건물들은 필요 없이 화려하게 함.” [1]

뉴맨(A.H. Newman)은 또한 교회사 편람 1권(A Manual of Church History)에서 이러한 수도사들의 지나침에 대한 위클리프의 반대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수도사들을 가증하다고 여겼고 많은 죄악의 원인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원함으로 공급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고 수도원의 부를 청했으며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부자와 가난한자들로부터 돈을 탈취했다. 그래서 그는 구걸을 없애려 마음먹었다. 그의 몇몇 라틴어로된 논쟁의 소책자에서 그는 모든 계층의 탁발(mendicancy)을 신약에서 선포한 사악한자와 동일시하려 했다. 이 “네 종파”에 관한 그의 넘치는 비통은 이러한 소책자들의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서 그들을 책망할 기회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2]

위클리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밀러는 그의 뛰어난 성격을 항목별로 적어보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과 그의 삶의 순수함과 굽히지 않는 용기와 설교자로서의 능변과 일반 사람들의 언어에 숙달함은 동경의 대상이 되게 했다. 그는 구원이 믿음으로 인하고 은혜를 통하며 사람이 한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것은 단지 외적인 죄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 전체 조직의 기초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신성한 지혜로 말미암아 그는 합당한 장소에서 합당한 방식으로 위대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일상 영어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해주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대중들의 생각에 그러한 위대한 진리들과 원칙들을 깊이 새겨 결국 이것들은 로마의 굴레와 횡포로부터 영국을 해방했다. [3]

위클리프의 성경 지식은 뛰어났습니다. 그의 생애의 끝 무렵에 완성한 삼자 대화(Trialogus)은 수많은 성경 단락을 사용한 것이 주목할 만 합니다. 그것은 위클리프가 성경에 얼마나 정통한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를 대적하는 이들조차 그들이 말씀에 대한 학식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레클러(Lechler)가 다음에서 말했듯이 그렇다고 해서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그를 대적하는 사람중 하나는 그를 “이단 오캄(Heretic Occam)”의 지지자 라고 했다. 다른 말로 그가 오캄에게서 성경에만 의지하는 원칙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사람들은 어떤 수상하거나 잘못된 경향이 나타날 경우 그것을 과거에 이미 불건전한 교리라고 정죄받고 낙인찍힌 것들과 동일시하고 그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4]

옥스퍼드에서 그리고 정부에서의 그의 영향력

신학박사로서의 위클리프의 지위는 대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는데 이는 그에게 신학 강의를 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밀러가 다음에서 지적했듯이 위클리프는 이 기회를 사용해 그의 관점들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옥스포드의 학장(master)으로서 젊은 신학자들에게 말했고 학교에서 그러한 권위가 있었기에 그가 하는 말은 신탁(oracle)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당시 참석한 수많은 학생들의 생각에 그가 미친 유익한 영향력은 어림잡기도 힘들다. [5]

논쟁이 일었고 위클리프는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떤 논쟁은 교황 우르반 8세(Urban V)가 에드워드 왕 3세(Edward III)는 지난 33년간 거두지 않았던 모든 조공을 즉각 지불하라고 요구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조공은 봉건제도의 한 부분이었으며 왕들이 매년 그들이 교황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 그 이상이었습니다. 대중의 여론은 교황을 위해 모금한 돈은 외국 정부나 적국의 정부를 지원하는 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조공 지불을 거절했을 때, 의회의 동의를 받았습니다. 궁정 사제였던 위클리프는 왕의 거절을 교황에게 전달할 의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더 이상 로마 교황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와 자유의 옹호자로서의 위클리프의 명성은 옥스포드 밖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위클리프가 드나드는 것을 주의 깊게 주시했으며 그의 공개 연설을 세밀히 조사했습니다. 다른 한 면으로, 왕과 의회의 대중은 교회와 국가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위크리프에게 자문을 구하는 정도로 그의 성실함과 판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로마 교황직의 권력의 쇠퇴

그 당시 교황은 로마가 아니라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에 있었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교황의 바벨론 포로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은밀히 술책을 써서 프랑스로 옮겼습니다. 1378년 로마에 있는 교황과 프랑스에 있는 교황이 경쟁을 하자 교황의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교황직의 권력을 쇠퇴시켰습니다. 십자군(crusades)역시 교황직을 약화시켰습니다. 단지 십자군이 성공적이었고 수백만의 십자군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군들이 그 지역 근교를 벗어나면서 그들의 생각의 범위가 도시들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도시들의 크기와 숫자의 증가는 교황의 권력을 희생시켜 더욱 강력한 정부의 성장을 동반했습니다.

로마 교황직에 대항하는 그의 입장

1374년 위클리프는 교황에게 대사로서 보내심 받았습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교황의 저택에서 그 특징인 철저한 부패-탐욕과 정욕과 부정직 등등-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는 그의 이전 생각의 결론과 질문이었던 교황의 권위가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그가 본 것에 의하여 위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한 몸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가 바로 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심을 믿으며 이것으로 모든 다른 율법들을 인정한다. 나는 로마의 주교가 누구보다도 더 그 율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중 가장 위대한 것은 세상의 존귀나 명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삶과 방식안에서 그리스도를 그대로 쫓아가는데 있기 때문이다. 신실한 자는 교황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6]

밀러(Miller)는 다음 단락에서 교황에 반대하는 위클리프의 담대한 입장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참된 종교의 유일한 근원이다. 교황은 적그리스도, 로마의 교만한 세상적 성직자이며, the most cursed of clippers and purse-carvers” 라고 말했다. 고위 성직자들의 교만과 겉치레와 사치와 느슨한 도덕성은 그의 움츠려들게 하는 비난아래 쓰러졌다. 그 자신이 비난할 만한 여지가 없는 도덕과 깊은 헌신과 확실한 정직과 독창적인 웅변의 사람이었기에 수 많은 이들이 담대한 교수주위에 몰렸다. [7]

클레르보의 버나드는 천주교 주교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지만 적그리스도의 종들이다. 그들의 박차와 고삐와 안장 위에 있는 금은 제단에 있는 금보다 더욱 반짝인다. 그들의 상은 음식과 술잔으로 화려하여 그들은 술취하고 폭식한다. 그들의 인도자들은 식량으로 창고를 채웠으며 그들의 지하실은 포도주로 넘쳐흐르고 그러한 보상 때문에 사람들은 주교들이 되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공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흑암에서 행하는 일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8]

이러한 점에서 위클리프가 버나드를 따른 것이 명백합니다.

화체설(Transubstantiation)에 대항하는 그의 입장

위클리프는 하나님에 대한 믿는이들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책임에 대한 사실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든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권위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을 사용하는데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교황과 왕들의 절대 권위와 제사장의 중제의 필요성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을 부인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논쟁과 강한 반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1381년 그가 화체설 교리를 부인하는 것을 출판하자 그 자신의 대학이 그를 버렸습니다. 그는 1378년 화체설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화체설 교리를 열심히 지지했습니다. 아우비그네(D'Aubigne)는 이 가르침에 관한 위클리프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위클리프는 거대한 힘으로 이 교리를 부인했다. 실로 그는 화체설보다 더 교활하게 교회안으로 몰래 들어온 이단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그의 입장을 완전히 바꾼 이유는 명확하다 - 그는 그것이 성경(복음서와 서신서들)에 반대되고 초대 교회 전통이 지지하지 않고 명백히 의식의 간증에 반대되고 거짓 이론에 근거한다고 비난했다. 막대한 힘으로 더 나아가 선언하기를 그 교리는 참으로 우상 숭배적이고 성경의 정당한 이유없이 사제의 교만한 요구를 만든다고 했다. 요컨데, 미사의 교리는 위클리프에게 그의 일생의 끝에서 “신성모독의 기만”이나 그의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거룩한 곳에서의 틀림없는 폐허의 증오 ”였다. [9]